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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RET

비가 내리는 오후, 저녁을 먹고 나른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한 부부의 집전화가 집을 가득 메울 정도로 울려댔다. 평소와 같이 남자는 보고 있던 야구프로의 볼륨을 낮추고 집전 화를 받으러 성큼성큼 다가갔다. 남자의 ‘여보세요’하는 말이 거실에 울러 펴졌고, 더 이상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여자는 쓰고 있던 가게부에 손을 놓고 남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무슨 일 있어요?”

남자는 여자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전화기를 붙잡고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심각한 분위기를 인식하고 남자가 들고 있던 전화기를 뺏었다. 전화기를 뺏자마자 남자는 잠시 비틀거리더니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풀썩 주저앉았다. 여자는 재빨리 전화기 너머의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안하더니 한숨을 뿜으며 이야기 하였다.

‘어머니, 현주가 학교폭력으로 인해 자살을 하였습니다. 지금 빨리 학교로 올라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학교 측에서는 모든 책임을 가지고 수사를 할 것이며 현재 가해자 학생들도.’

“현주가……. 현주가 자살을예. 아니, 선생님 거짓말 하시는 거죠?”

‘.....’

여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고여 흘러내렸다. 아니, 눈물을 흘리기 보다는 통곡을 하고 있었다. 충격이 큰 것인지 입 밖으로 소리도 내지 않으며 그저 꺽꺽 대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현주’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남자가 전화기를 들어 ‘지금 올라가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아무렇게나 소파에 놓여있는 재킷을 집어 들어 빠른 속도로 입었다.

“빨리, 빨리 가보자 현주 엄마. 가면서 울자. 응?”

꺼익꺼익 울고 있는 현주엄마는 겨우 그녀의 몸을 일으켜 현관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현관으로 가는 도중 그녀는 허공을 보며 말하였다.

“현주야……. 현주야……. 서울 가서 고마 공부한다드니 글로 가버리면 우짜노…….”

✥✥✥✥✥✥✥✥✥✥✥✥

첫 고등학교 입학이다. 물론 여기는 우리 지역이 아닌 서울이지만 괜찮다. 내 말투와 소극적인 면만 어떻게 한다면 서울 친구들도 날 친구로 받아줄 것이다. 그리고 공부를 하기위해 서울에 왔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집중을 부을 것이다. 다른 친구들 보다 조금 일찍 온 것인지 반은 텅 비어있었다. 그래서인지 앞자리를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반에 아이들이 한둘씩 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서로 아는 친구들이 있는지 전부다 짝이 된 채 들어왔다. 나는 나의 3년 생활을 위해 자신을 내며 그들에게 손을 뻗었다.

“아. 안녕?”

약간은 어색한 인사였지만 그들은 나에게 시선을 돌렸고 웃는 미소로 안녕? 하고 반겼다. 계획 성공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나의 자리에 가까이 앉았고 서로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사실 약간의 사투리 때문에 입을 여는 것을 꺼려하였지만 그래도 자신감 있게 나의 안부를 물어보는 친구에게 말하였다.

“난 신현주라고 하고 니들이랑 다르게 쫌 멀리서 왔다”

그들은 나의 특이한 억양에 약간 놀란 눈치였지만 그저 웃으며 가볍게 넘어갔다. 특히 현재 내 옆에 있는 수미라는 아이가 웃으니 예쁜 미모가 더욱더 부각되어 나타나는 것 같았다. 역시 서울애들은 대부분이 예쁘장하구나……. 신기할 나름이었다.

학생들이 점점 많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영광의 1교시를 시작하였다. 책상 배열은 신기하게 3명씩 짝지가 될 수 있어서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나의 새 친구들 수미와 지현이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담임 선생님은 간단히 선생님 소개를 하셨다. 그녀는 이번 일 교시는 담임시간이므로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넘기자고 하였다. 교실 내의 반응은 반은 야유가, 반은 환호가 있었다. 내 친구 지현이는 약간 툴툴되며 자기소개 시간이 가장 싫다고 말하였다. 나도 많은 반 학생 앞에서 나의 소개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약간 쑥스럽기는 하였다. 그것도 남녀공학 고등학교기 때문에 남자아이들의 시선 또한 신경 쓰였다. 다행이 번호대로 하는 자기소개 때문에 나는 중간쯤에 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름 김다현, 나이는 너희들과 같이 17살이야”

다른 아이들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저 김다현이라는 친구는 내 눈을 사로잡았다. 약간 물들인 머리, 고양이 눈과 같은 날카로운 눈매에 방금 막 떨어진 별똥별과 같은 피부를 가지고 있는 친구였다. 그녀는 알맞게 줄인 교복 때문인지 섹시한 몸매가 더욱 부각되어 나타났다. 그녀는 외모로써 완벽하였다. 같은 여자로써 이렇게 예뻐도 되는가? 라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의 친구들을 살펴보니 나와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였다. 특히 남자아이들은 더더욱 심해 보였다.

“나 건드리는 거 별로 안 좋아 하니까 알아서 가려줬으면 좋겠어.”

눈매와 같이 도도한 말투를 가진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의 외모와 매우 잘 어울렸다. 그녀는 그녀만의 독특한 향수 냄새를 남기며 자리로 돌아가였다. 와, 정말 소설에만 보는 듯한 여자 주인공을 눈앞에서 보는 듯하였다. 부럽다. 지현이와 수미의 응원을 받으며 드디어 교실 앞쪽으로 걸어 나갔다. 별것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치 많은 관객들에게 둘러 싸여있는 오페라 배우의 심정과 같이 미친 듯이 두근대었다.

“아…….안녕!”, 나는 굳게 다물어 있는 입을 때내었다.

“나는 신현주라고 해! 아랫지방에서 왔고, 쪼매 부족하더라도 니들이랑 친구가 되고 싶어!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후하, 드디어 끝났다. 내심 아이들이 나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이내 그 생각도 어떤 행동 하나 때문에 싹 달아났다.

“질문 있어”

손을 든 친구는 다름 아닌 예쁜 다현이였다. 우와! 저런 친구가 나에게 질문을 해주다니, 살짝 신기하기도 하면서 설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현이는 새빨간 그녀의 입술 입 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하였다.

“너 피자가 뭔지 알아?”

조용하던 반이 순식간에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주위 친구들과 함께 웃고 있는 다현이를 응시하였다. 피자가 뭔지 아냐니, 당연한 것 아니야? 왜 저런 질문을 하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남자아이들의 질문이 우르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럼 pc방이 뭔지는 알아?”, “혹시 푸세식, 아 아니 헛간 같은 곳에서 볼일 보는 거 아냐?”, “옷 같은거 엄마가 만들어 주는 거야?”.

순식간에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나는 그들의 질문을 전부 듣지는 못하였지만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나 지금 무시 받고 있는 거구나. 하고 말이다. 선생님도 반 안에 없는 탓에 그들의 행동을 제지 할 수 없었다. 지현이와 수미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 또한 킥킥대며 웃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나는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삼키며 빨간 얼굴을 들어내며 말하였다.

“pc방 뭔지 알거든! 컴퓨터 많은 곳이 다이가, 그리고 헛간 같은 거 안 쓴다! 우리도 양변기.”

살짝 흥분을 해서 그런지 사투리가 더더욱 심하게 튀어나왔다. 그러나 싸늘한 다현이의 반응은 나의 눈물샘을 더 자극하였다.

“어쩌라고, 다음 번호 소개해야 하니까 들어가 줄래? 아, 아니 이렇게 해야지 알아듣나? 끄지라 고마!”

김다현은 내 심정은 알기는 아는지 날 희롱하며 다른 친구들과 낄낄대며 이야기 하였다. 이게 무슨. 무슨 쪽이야…….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나마 그 중에서 나의 심각성을 눈치 챈 것인지 지현이와 수미는 나에게 괜찮냐는 둥 말을 걸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서울 친구들이 아직 뭘 많이 모라서 그러는 것일 거야. 설마 우리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겠어.. 나는 우러나오는 눈물을 힘들게 삼키고 지현이와 수미를 바라보며 이야기 하였다.

“응! 괜찮아, 모를 수도 있는 거지. 니들도 몰랐잖아?”

그들은 나의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 그냥 웃으며 넘어갔다. 타고 타는 나의 마음은 뒷전인체 말이다.

몇 주 동안 김다현은 나에게 더 이상의 시비를 걸지 않았다.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지현이, 그리고 수미는 행복한 학교생활을 보냈고 가끔 야자가 끝나면 나의 자취방에 모여 수다를 떤 적도 있었다. 수다를 떨다 보니 지현이는 반 안에서 자신이 예부터 좋아하는 아이와 같은 반이라며 날 뛸 정도로 좋아하였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좋은 친구겠지? 부모님 또한 그런 나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몇 주를 보내며 학급활동 중 반장 선거가 있었다. 나도 나가고 싶었으나 우리 반에서 두 번째로 인기 많은 영운이가 출전한다는 말을 듣고 재빨리 포기해 버렸다. 선거에 출전해봤자 떨어질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예상과 같이 영운이가 반장이 되었다. 착하디착한 그의 성격과 잘생긴 외모 덕분에 학교생활은 더 즐거워졌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몰랐다. 곧 나만의 재앙이 시작될 것이란 것을 말이다.

3월 모의고사가 끝났다. 어떤 학생들은 성적을 받고 펑펑 우는 친구들이 있었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의 점수는 형편없었다. 흑, 정말 개인 과외 자리라도 알아봐야 하는 것인가. 드디어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이 푹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때 표정이 좋지 않은 지현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깜짝 놀라며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찰나 길게 머리를 늘여놓은 김다현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냥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포스트잇에 적어놓은 내 점수를 본 것인지 업신거리는 말투로 모든 학생들이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말하였다.

“이거 점수라고 받은 거니?”

지현이 에게 다가가던 나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어 섰다. 뭐지? 왜 나에게 저런 말을 하는 것이지? 저번도 그렇고 이건 아니잖아? 나는 기분이 나쁘다는 인상을 팍 지으며 뒤로 돌아보았다. 그런데 나를 더욱 어이없게 하는 것은 너무나도 뻔뻔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과 자세였다. 그런 그녀의 뻔뻔한 태도를 무시하고 나는 그녀에게 화난 어조로 말을 하였다.

“네가 뭔데 내 점수보고 그러는 건데? 빨리 포스트잇 내놔라”

“빨리 포스트잇 내놔아라- 큭, 말투가 그게 뭐야.”

다현이는 나를 조롱하는 듯이 내 말투를 따라하였다 그리고 포스트잇을 바닥에 휙 던져버렸다. 나는 그녀의 눈을 빤히 응시하였지만 눈빛을 돌려 재빨리 포스트잇을 주웠다. 젠장, 젠장, 젠장.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포스트잇을 주을려고 손을 뻗자 누군가가 내 손을 발로 밟았다. 나는 꺅 하는 소리와 함께 반사적으로 손을 빼냈고 화끈 거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주물렀다. 그러자 나의 위에서 들리는 김다현의 목소리.

“어이쿠, 실수~ 친구끼리 실수도 할 수 있지, 그치?”

“…….”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무서워서 그런 걸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돌려 김다현이 아닌 조용해진 주위의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모든 친구들이 날 주시하고 있었고 심지어 지현이 마저 울음을 그치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보지 마, 정말 내가 왕따라도 된 것 같잖아. 제발, 제발…….

“그만하지 김다현. 조금 심한 거 아니야?”

조용한 반 안에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울러 퍼졌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그가 누군지 바라보았다. 다름 아닌 반장 영운이였다. 그의 표정은 다른 때와 다르게 진지해 보였고 그의 발걸음은 화난 황소처럼 성큼성큼 다가왔다. 영운이는 날 그의 뒤로 숨게 하고 김다현에게 말을 걸었다.

“좀 심하단 생각 안 해?”

“왜, 친구끼리 장난치는 건데. 남자애들은 더 심하게 치잖아?”

“그래도 선이 있지, 내가 볼 때는 아닌 것 같은데? “

김다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영운이의 등 뒤에서 슬그머니 보니 김다현은 입술을 잘끈 깨물며 반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후 김다현의 친구들도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꼴좋다 김다현. 짜증나게 할 때부터 알아봤어. 근데 그건 그렇고 영운이 등. 정말 넓다. 암흑을 연상시키는 흑발에다가 그와 대조되는 하얀 피부. 도톰한 입술까지 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미쳤다 신현주!

영운이는 등을 돌려 무릎을 굽히며 내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괜찮아? 하고 안부를 물어봐 주었다. 뭔지 모를 답답함이 내 턱 끝까지 차고 올라 겨우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영운이는 다행이라며 내 어깨를 툭 치고 가주었다. 이럴 수가, 정말 황홀한 기분이었다. 이 미묘한 느낌이 싫지만은 않았다. 나는 아직까지 바닥에 흘려져 있는 포스트잇을 주워 울고 있을 것 같은 지현이에게 다가갔다. 다행이 반 분위기는 평소와 같이 시끌벅적한 상태로 돌아왔고 나는 그 분위기에 맞추어 지현이에게 밝은 모습으로 가까이 갔다.

“지현아! 괜찮아? 나도 모의고사 못...”

“재수 없어”

어?.. 음? 내가 뭘 들은 거지? 재수.. 재수가 없다니? 순간적으로 지현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악마, 악마의 눈빛을 말이다. 나는 벙찐 얼굴로 날 날카롭게 바라보는 지현이와 수미를 향해 말하였다.

“왜..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김다현에 이어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정말 내가 뭘 잘못하기라도 한 것일까?

“촌년주제에, 짜증나”

그렇게 수미와 지현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를 등 뒤로 한 채 밖으로 나갔다.

시끌벅적한 반은 내 절망감을 묻어가고 나는 그 자리에서 그저 지현이와 수미가 있었던 빈자리를 바라보며 허탈 웃음을 지어냈다. 사실 지현이와 수미를 쫒아가 무릎을 빌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힘이 없었다. 눈에서 눈물이 나왔지만 혹여나 누군가가 볼까봐, 저기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영운이가 날 볼까봐 얼른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날 저녁, 나 홀로 쓸쓸이 석식을 먹고 반으로 돌아왔다. 석식 시간이 되었지만 지현이와 수미가 나를 향한 태도는 여전하였다. 너무나도 답답하여 그들에게 다가가 이유를 물어보려고 하였지만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가까이만 가려고 하면 자리를 피해버렸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휴대폰 액정이 빛을 비추더니 지잉 하고 알람이 울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의 휴대폰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모든 아이들의 휴대폰 액정이 울리고, 학생들의 시선은 자신들이 휴대폰으로 몰렸다. 나는 무슨 일이 난 것인가 싶어 재빨리 휴대폰 잠금장치를 풀어 알람 내용을 확인하였다.

‘속보! 1학년 4반 신○○학생, 친구가 좋아하는 남자까지 뺏어갈려하다?!’

나는 휴대폰을 확인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리 반에 ‘신’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나만이 유일한 존재였다. 나는 혹시나 내가 잘못 본 것인가 싶어 다시 액정을 확인하였지만 메시지 내용은 여전하였다. 심지어 메시지 발신을 한 사람도 발신제한으로 표시되어 있어 전화도 못 거는 상황이었다. 그때 내 귀에 들리는 웅성이는 소리. 주위를 둘러보니 친구들은 모두 휴대폰을 잡고 있었고 마치 벌레를 보는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 많은 눈빛들 중 지현이의 눈빛은 누구보다 날카롭고 애슬퍼 보였다. 아무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지현이 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지현아, 정말 오해야. 네가 누굴 좋아하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사람을 뺏어갈려고 하겠어? 응? 제발 믿어줘.”

눈에서 눈물이 왈칵 흘렀다. 나는 지현이의 손을 부여잡고 나의 이야기를 믿어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지현이는 나의 부탁과는 다르게 차갑게 불어오는 눈보라와 같이 내 손을 뿌려졌다. 눈물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지현이의 표정은 최악 그 상태였고, 그녀 또한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지현이는 차갑게 날 지나쳤고, 나는 이번에도 지현이의 빈자리만 빤히 바라보았다. 그때 날 비꼬는 김다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신현주. 촌에서 왔는데도 꼬리치는 여우네? 신기하다 야……”

아, 김다현. 김다현의 짓이다. 김다현의 짓이 틀림없다. 날 이렇게 약 올리는 사람은 신현주 말고는 없다. 아까 영운이가 날 도와준 것 복수하려고 그러는 거지? 그렇지? 난 눈물을 빨리 닦고 김다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네가 그랬지? 네가 나 열 맥이려고 그런 거지? 왜? 왜!!”

“무슨 소리야, 나도 금방 문자 받았구먼. 생사람 잡는 거 정말 잘한다.”

“거짓말, 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 다 알아”

그때 김다현의 친구 중 한명이 날 밀쳤다. 안 그래도 힘이 없었는데 그가 날 민 탓에 내 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짧은 비명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들은 내 넘어진 모습을 보며 킥킥 웃어대더니 입을 열었다.

“이런 게 일부러 하는 거야 현주야. 촌에서 올라오더라도 말은 알아들어야지?”

그들의 말이 끝나자마자 석식시간을 종료하는 종이 울렸다. 우리들의 싸움을 구경하던 아이들은 종이 치자마자 정신을 차렸다는 듯 나에게 신경 하나 쓰지 않고 가방을 챙겨 야자실로 나갔다. 날 괴롭히던 그들 또한 그들끼리 가방을 챙기며 밖으로 나가였다. 반에는 나 혼자만이였다. 나 혼자만이……. 쓸쓸히 남아있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김다형 무리의 괴롭힘은 심해졌다. 심지어 악성 문자들과 계속해서 초대되는 카톡 방 때문에 휴대폰을 정지하고 아예 들고다니지 않았다. 부모님에게는 공부에 휴대폰이 방해되는 것 같다고 말하였다. 사실 부모님에게는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아신다면 무조건 걱정하실 테니 말이다. 안 그래도 걱정이 많은 부모님에게 더 많은 걱정을 끼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현이와 수미는 날 아예 모르는 척 하였고 반 아이들 또한 날 무시하며 그저 당하는 모습을 동물원의 동물을 바라보듯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영운이는 달랐다. 내가 당할 때마다 김다현을 제지하였고, 밴드를 사 건내주는등 나에게 유일하게 관심을 가져다주는 친구 중 한 명이였다. 나는 오늘도 그들의 괴롭힘을 받으며 영운이의 도움을 기다렸다.

오늘만은 김다현에게 괴롭힘을 받고 싶지 않아 수업이 마치자마자 화장실 칸 안에서 묵묵히 점심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화장실에 냄새가 나지만 그들의 괴롭힘이 날 더 힘들게 한다. 그러니 이런 것쯤은 참을 수 있다.

그때, 내 머리 위에서 무언가가 쏟아져 내렸고, 나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다.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가 되었다. 정신을 차려 내 모습을 보니 흠뻑 젖은 소매를 보았다. 머리에는 물이 맺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물……. 지금 물을 뒤집어 쓴 건가? 밖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 역시나 그 녀석 들이였다. 그들은 깔깔 웃으며 문을 쾅쾅하고 두드렸다.

“문열어봐, 무슨 꼴인지 보자. 흠뻑 젖은 모습이면, 소나기에 나오는 그 소년의 모습이려나?”

나는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지만 문을 열지 않는다면 또다시 부을 것이라 하는 그들의 협박에 못 이겨 문을 열고 말았다. 물을 열자 앞에 보이는 몇몇의 남자아이들과 호탕스럽게 웃고 있는 김다현이 보였다. 그녀는 내 모습을 보고선 한 번 더 크게 웃어댔다.

“화장실 청소를 하려고 했는데 이상한 게 나왔네! 푸하하하하!!”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머릿속에는 엄마와 아빠의 얼굴만이 생각났다. 그러자 눈에 눈물이 점점 고이더니 떨어지기 시작하였지만 이미 젖은 탓에 눈물인지 물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옆으로 지나가려고 하였지만 계속해서 남자 아이들이 날 못 가게 막더니 결국 구석에 몰리고 말았다. 아이들이 전부 밥을 먹으러 간 것인지 화장실에 들어으는 학생들은 없었다. 뭐, 화장실에 들어온다고 하여도 날 도와주지는 않을 테지만. 김다현은 웃음소리를 멈추고 갑자기 안타까운 동물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 장소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어머, 현주야. 너 꼴이 너무 야하다. 이거라도 걸치고 있어”

그녀는 손에 들려있는 무언가를 휙 던지더니 이만 이라는 인사와 함께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난 그녀가 나가자마자 그녀가 나에게 던진 무언가를 보았다.

“…….”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올 듯이 나왔다. 그 ‘무언가’는 부모님이 생일 때 사주신 가디건 이였다. 나는 그 가디건을 품안으로 안으며 미친 듯이 울어댔다. 울던 도중 고개를 돌려 날 비추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나의 꼴은 만신창이였다. 물 때문에 홀딱 젖은 하얀 블라우스 때문에 속옷이 힐끔힐끔 비쳤고 머리는 산발이 되었다. 내가 이런 꼴로 사람들 앞에 있었다니,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어차피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화장실, 풀썩 주저 앉은 채 펑펑 울었다. 내가 왜 그들의 괴롭힘 대상이 되었는지, 이런 수치를 당해야 하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벗어나고 싶었다.

“....현주야? 거기 현주지?”

내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 나는 그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음을 뚝 멈추었다. 화장실 문이 열렸고, 그 누군가는 내 예상과 같이 영운이였다. 영운이는 한손에는 음료수를 들고 있는 채로 날 놀란 토끼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울음을 멈추고 코를 훌쩍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차, 내 꼴! 나는 품에 들고 있는 가디건을 입어 재빨리 젖은 와이셔츠라도 숨겼다. 그런 모습을 본 영운이는 굳은 표정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와 날 일으켜 세우며 말하였다.

“김다현 짓이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영운이는 말없이 자신의 마이를 벗어 나에게 씌워주었다. 그리고 내 손목을 잡고 아무도 없는 음악실로 데리고 갔다. 그는 날 의자에 앉히더니 잠시 기다려라고 하였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뛰어가는 영운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옆에 있으니 잠시나마 따뜻하였다. 부정적인 생각이 싹 가셨고, 내 머리를 아프게 하는 못된 두통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몇 분 뒤 영운이가 돌아왔고, 그가 평소에 사용하던 손수건과 그의 체육복을 가지고 와 나에게 건네주었다.

“일단 손수건이라도 가져왔으니 이거로라도 닦아. 그리고 나가있을 테니까 내 옷으로 옷 갈아입어”

난 영운이의 손수건을 받아 고개를 끄덕였다. 영운이는 말대로 밖으로 나가는지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런 마음씨 착한 영운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그마저 날 괴롭혔다면 아찔한 계획을 실행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체육복을 다 입었다. 그의 체육복은 나에게 매우 컸지만 접어서 입으니 그나마 입을 만 하였다. 체육복 정리가 끝날 때 쯤 영운이가 노크를 하며 들어가도 되? 라고 말하였고 나는 크게 응이라고 말하였다. 문이 열리고 영운이가 들어왔다. 그는 나에게 따뜻한 음료를 건넸다.

“고마워”

처음으로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였다. 사실 엄청 부끄러웠다. 이런 도움을 받고도 이때까지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못한 나의 부끄러움과 뭔가 모를 미묘한 감정과 섞여 말이다. 나의 말을 들은 영운이는 역으로 나에게 말하였다.

“아니, 내가 항상 고마워”

영운이는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였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나에게 고마워 할 것은 없었다. 그런데 왜 고맙다고 하는 것이지? 그는 말을 이었다.

“너무 잘 당해줘서 고마워, 아 촌년이라 뭘 모르는 건가?”

영운이의 입에서 촌년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네가 왜. 나한테 촌년이라 하는 거야 영운아? 나는 벙찐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영운이는 누구보다 잘생긴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하였다.

“덕분에 착한 이미지는 다 가지고 가 촌년. 아, 김다현 그 무리도 내 지시 때문에 고생했겠다, 그지? 걔들한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겠는걸.”

“무슨 말이야 영운아. 네 지시라니? 그게 무슨”

“서울말 못 알아들어? 내가 시켜서 걔들이 너 괴롭힌 거라고. 뭐, 물론 이것 때문에 조금 귀찮아 지기는 했는데 선생님이 아주 좋게 날 보더라. 역시 반장하며 말이지. 고마워 촌년!”

영운이는 씩 웃으며 나에게 손을 건넸다. 그의 눈은 매우 침착해 보였다. 아니, 침착성을 넘어 마치 평온해 보였다. 저게 진짜 영운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헛구역질이 나올 뻔하였다. 나는 꾹 참으며 영운이 에게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였다.

“이때까지 날 진심으로 도와준 적 있어?”

나의 질문을 들은 영운이는 한참 생각하더니 밝게 웃으며 말하였다.

“아니!”

영운이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나는 교무실로 달려갔다. 더 이상 나 스스로 버티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교무실로 달려가는 도중 영운이가 이때까지 나에게 베풀었던 호위의 행동들을 생각하였다. 이럴 수가! 이건 모순이 아닌가! 영운이의 큰 체육복 때문에 걸려 넘어졌지만 나는 다시 일어나 교무실로 달려갔다.

교무실 문을 열어 선생님의 자리로 박차고 달려갔다. 선생님은 이제 막 식사를 마치셨는지 커피를 마시고 계셨다. 선생님은 흠뻑 젖은 내 모습을 보시며 고개를 갸우뚱 거리셨다. 난 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 하는 것을 볼 틈이 없이 선생님에게 말하였다.

“선생님 제가 학교폭력을....”

“후, 그걸 이 까지 와서 말해야 겠니 현주야? 선생님이 반장한테 부탁해놨는데. 아, 저기 때마침 반장 오네. 영운아!”

고개를 돌리니 영운이가 살짝 숨이 차는지 헥헥 거리는 모습으로 교무실 문을 열었다.

“깜짝아 현주야! 갑자기 달려가면 어떻게 해!”

내 몸은 완전 일시 정지 해버렸다. 영운이가 나에게 다가오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지금은 금방 전에 받은 기묘한 느낌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건 두려움의 심장소리였다. 싫어…….

“자, 선생님 바쁘니까 반장이랑 이야기 해봐!”

싫어! 싫어! 싫어! 제발 선생님!

“자, 반으로 가자 현주야!”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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